병원에서 환자 진료나 수술, 약물 치료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나오는 폐기물은 단순한 쓰레기가 아닙니다. 혈액에 묻은 거즈, 사용한 주사기, 수술 도구, 폐의약품이 함께 혼합된 이 폐기물은 의료폐기물이라는 법적 용어로 분류되며 감염성과 화학성, 환경 오염 가능성 등 복합적인 위험 요소를 안고 있습니다. 의료폐기물은 일반적으로 특수 용기에 보관되고 중간처리장을 거쳐 소각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 과정에서 감염균과 유기물은 대부분 사멸하거나 분해되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환경과학 분야에서는 소각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의료폐기물 속 ‘약물 성분’이 환경에 남아 축적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항생제, 항암제, 호르몬제, 마취제, 진통제 등은 병원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그 일부는 의료폐기물 형태로 남아 폐기되는데 이 성분들이 소각 잔재, 누출된 침출수 또는 배출된 연소가스 내에 잔존하면서 하천과 토양, 심지어 식수로까지 유입되는 사례가 전 세계적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즉, 의료폐기물 관리에서 약물 성분의 존재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시간차를 두고 환경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이슈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의료폐기물 중 약물이 어떤 경로로 배출되고, 환경에 어떤 방식으로 잔류하며 그에 따른 정책적·기술적 대처 방안은 무엇인지 단계별로 살펴보겠습니다.
의료폐기물로 남겨진 어떤 약물이 문제인가?
병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의약품 중 일부는 치료가 끝난 후에도 환자의 체외로 배출되거나 의료용품에 흡수된 채로 의료폐기물로 남게 됩니다. 문제는 이들 약물 중 상당수가 자연적으로 분해되지 않으며 고온에서도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내성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문제 약물군은 다음과 같습니다.
항생제
항생제는 세균을 억제하거나 죽이기 위해 사용되며 그 일부는 거즈, 주사기, 약물 잔량으로 폐기됩니다. 이 잔류 항생제가 하수나 하천에 유입될 경우 세균의 내성을 유도해 항생제 내성균(슈퍼박테리아) 발생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호르몬제
에스트로겐, 테스토스테론 등은 유방암 치료나 호르몬 대체요법에 사용됩니다. 이들 약물은 미량이라도 환경 중에 노출되면 수서 생물의 성전환, 생식력 저하, 생태계 불균형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특히 어류에서 암수 구분이 모호해지는 사례는 EU 일부 지역에서 보고된 바 있습니다.
항암제
항암제는 세포 분열을 억제하는 독성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환경 중 잔류할 경우 유전자 돌연변이 유발, 물벼룩 등 저등생물의 치사율 증가 등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WHO가 지정한 환경 우선 감시 물질에 포함되기도 합니다.
마취제·진통제
마취제와 오피오이드계 약물은 중독성과 함께 생물축적성이 높아 하수로 배출될 경우 수질 정화 시스템을 통과해도 일부가 잔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약물 종류마다 환경에 끼치는 영향의 형태와 강도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분해되지 않고 환경 내에서 축적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의료폐기물 속 약물이 환경에 미치는 구체적 영향
의료폐기물 속 약물 성분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다층적으로 나타납니다. 일부는 직접 배출되지 않더라도 소각 시 연기, 슬러지, 처리 과정의 침출수를 통해 간접적으로 하수처리장이나 하천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항생제 내성 확산
세계보건기구(WHO)는 항생제 내성균의 4대 원인 중 하나로 ‘의약품의 환경 배출’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수처리장 방류수에서 다제내성균(MRSA)이 검출되거나 환경에 남은 미량 항생제에 노출된 미생물이 내성을 획득하는 사례는 유럽, 중국, 한국 일부 지역에서도 관찰된 바 있습니다.
생물농축 및 생식 장애
호르몬제, 항암제는 분해되지 않고 저등생물의 체내에 축적될 수 있으며 미량이라도 생물의 번식, 성장, 행동 패턴에 영향을 주는 내분비계 교란물질로 작용합니다. 환경부는 이를 미세 오염물질(micropollutants)로 정의하고 있으며 현재는 검출 기준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수질 오염과 식수 위협
약물이 포함된 침출수가 정수 시스템을 거치더라도 활성탄, 오존 처리로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수돗물 내 극미량 약물 성분 검출 보고서도 일부에서 공개된 바 있습니다. 물론 인체 건강에는 당장 문제가 없지만 장기적인 축적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과학계에서 지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토양 오염
의료폐기물 소각 후 남은 재 또는 매립 시 처리 부적정으로 인한 약물 성분의 잔류는 토양 내 미생물 생태계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특히 일부 항생제는 박테리아 밀도를 낮추어 토양의 질소순환에 악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의료폐기물 속 약물은
직접적 감염 위험은 없을 수 있으나 지속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생태계를 약화시키는 장기적 위협 요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의료폐기물 소각 처리 과정에서의 한계
의료폐기물은 대부분 고온 소각 방식으로 처리됩니다. 표준화된 시설에서는 850℃ 이상에서 연소가 이뤄지며 이 과정에서 병원균, 유기물 등은 대부분 사멸합니다. 그러나 모든 성분이 완전히 분해되지는 않으며 특히 약물 성분은 일부 고온에서도 열 안정성을 갖고 있어 완전 분해가 어렵습니다.
분해되지 않는 약물 구조
항암제, 일부 호르몬제는 고온에서도 분자구조가 쉽게 깨지지 않으며 그 결과 소각재나 연소가스 내 잔류 성분으로 일부 남을 수 있습니다.
이 잔류물은 다시 소각 후 잔재 처리 과정에서 환경으로 유입될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비정상 연소 및 배출가스 문제
소각 설비가 일시적으로 온도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거나 운영 오류로 인해 불완전 연소가 발생할 경우 유해가스와 미세 화합물이 포함된 배출물이 외부로 누출될 수 있습니다. 실제 일부 의료폐기물 소각장에서 다이옥신, 벤조피렌과 같은 유해 물질과 함께 약물 성분 계열의 미량 화합물이 검출된 사례가 존재합니다.
침출수 처리의 불완전성
소각 전 임시 보관 중에 냉장고 또는 용기 손상으로 액상 약물이 유출될 경우 해당 성분은 의료폐기물 보관 구역 바닥, 수거 차량, 처리장 바닥을 통해 침출수로 흘러들어가 하수처리장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하수처리 시스템이 생활계 유기물 제거 기준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의약 성분 제거 효율은 낮다는 점입니다.
결국 의료폐기물의 최종 처리 방식인 소각과 하수처리 단계에서 약물 성분이 일부 남아 환경으로 유입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며 이는 의료폐기물의 보이지 않는 2차 오염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해외 규제와 국내의 차이 – 왜 우리는 약물을 의료폐기물로만 보는가?
국제적으로는 의료폐기물 내 약물 성분에 대한 분리 처리와 모니터링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특히 유럽연합(EU)은 약물 오염을 수질 지침(WFD) 내 우선 감시 물질 목록에 포함시키며 잔류 의약물질(PPCPs: Pharmaceuticals and Personal Care Products)에 대한 추적을 의무화한 국가들도 다수 존재합니다.
유럽연합(EU)
EU는 2022년 기준 에스트로겐, 디클로페낙 등 일부 약물 성분을 감시 물질로 지정하고 일정 농도 이상 검출 시 하수처리장 정비를 의무화하였습니다. 또한 특정 약물은 별도 용기 분리 후 전용 경로로 처리할 것을 병원에 가이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미국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약물의 수질 오염 악화를 인식하고 의약 폐기물 관리지침(RCRA 하위법)을 통해 의료기관이 고독성 약물을 폐기할 때 분리수거 및 등록 처리 업체에 위탁할 것을 명시합니다. 일부 주에서는 하수로의 약물 배출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내 현실
한국은 의료폐기물 내 약물 성분에 대해 분류 기준은 있지만 '약물 성분별 처리 기준'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약물이 남은 거즈나 폐주사기, 약물이 묻은 폐용기 등도 단순히 감염성 의료폐기물로 분류되어 동일한 소각처리를 받으며 약물 종류나 독성에 따라 차등 처리되지는 않습니다. 즉, 의료폐기물 내 화학물질로서의 약물을 관리할 법적 틀은 미비하며 이는 중장기적으로 의약품 오염을 추적·예방하는 기반이 부족함을 의미합니다.
대안은 무엇인가?
약물 성분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는 처리 방법 자체의 개선뿐 아니라, 관리 철학과 정책 틀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몇 가지 현실적인 대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약물별 전용 폐기 용기 도입
잔류 약물이 포함된 의료폐기물은 별도로 고위험 약물 전용 용기에 담아 분리수거하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특히 항암제, 호르몬제 등은 다른 감염성 폐기물과 분리해 운반, 소각되어야 2차 확산을 막을 수 있습니다.
약물별 소각 온도 및 장비 기준 마련
일부 약물은 고온에서도 완전히 분해되지 않기 때문에 소각로에서 해당 약물을 처리할 경우 처리 온도, 체류 시간, 배출가스 처리 설비 기준을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리 전 약물 성분 검출 시스템 개발
스마트 의료폐기물 분류 시스템에 약물 성분 스캐닝 기술 또는 예측 알고리즘을 연동해 어떤 폐기물에서 어떤 약물이 추정되는지를 식별하고 고위험군을 선별 처리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생산자 책임제 도입(약물 리콜 포함)
의약품 제조사에 대해 유통 후 폐기 시점까지의 잔류 물질에 대한 모니터링과 책임 부담을 부과하는 Extended Producer Responsibility(EPR) 개념을 의료폐기물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의료폐기물은 눈에 보이는 것만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소각하고 겉으로 사라졌다고 해서 그 안에 남은 약물 성분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화학물질은 하천으로, 토양으로, 식수로, 생물의 체내로 스며들고 우리가 재흡수하거나 생태계 파괴로 다시 되돌아오는 경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의료는 사람을 살리는 기술이지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흔적이 또 다른 생명을 위협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가 의료폐기물을 물리적 폐기물로만 보아왔던 시선을 넘어서 그 안의 화학물질, 잔류 약물, 생물학적 영향까지 함께 고려하는 관리 체계로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의 진보보다 감시의 체계, 분류의 정밀화, 책임의 확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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