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폐기물 처리 과정에서 탄소 배출권 거래가 가능한가?
전 세계가 탄소중립(Net-Zero)을 향한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산업 전반에서 온실가스를 감축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적, 제도적 접근이 시도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다소 주목받지 못했던 의료 분야의 탄소 배출이 서서히 조명 받고 있습니다. 특히 의료기관에서 배출되는 의료폐기물은 소각 처리 과정에서 다량의 이산화탄소와 기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어서 환경적 영향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의료폐기물은 감염성과 위해성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환경 논의에서 종종 예외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감염 예방을 위해 선택된 일회용품 중심의 의료 소비 패턴은 엄청난 양의 폐기물을 양산하고 있으며 이들 폐기물의 대부분은 소각을 통해 처리되어 직접적인 탄소 배출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료폐기물 처리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 탄소 배출권 거래제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의료폐기물이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양과 특성을 살펴보고, 탄소 배출권 시장에서 이 분야가 다뤄질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과 한계를 분석해 봅니다. 이를 통해 미래 의료 시스템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전략적 접근을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의료폐기물 처리와 온실가스 배출의 구조적 연관성
의료폐기물은 본질적으로 감염성 폐기물, 생물학적 폐기물, 화학적 폐기물로 분류되며 이들 대부분은 보건 안전상의 이유로 소각 처리가 원칙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고온 소각 방식은 1,000℃ 이상의 열을 필요로 하며 이 열을 생성하기 위해 다량의 전기 혹은 화석연료가 사용됩니다. 특히 의료폐기물은 일반 생활폐기물과 달리 대부분이 플라스틱 기반의 합성 고분자 물질이기 때문에 연소 과정에서 이산화탄소(CO₂) 배출량이 더욱 높습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대규모로 사용된 마스크, 방호복, 페이스쉴드, 주사기 등은 대부분 폴리에틸렌, 폴리프로필렌, PVC 등의 합성수지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이들의 소각은 일반 쓰레기보다 약 2~3배의 탄소를 배출합니다. 또한 폐기물 처리 과정에서 운송 차량의 사용도 무시할 수 없는 온실가스 배출 요인입니다. 대부분의 의료폐기물 수거 차량은 디젤 연료를 사용하며 하루 수회 이상 병원을 순회하여 의료폐기물을 수거한 뒤 소각장으로 이동합니다.
이처럼 의료폐기물은 ‘생산 → 분리 → 수거 → 처리’라는 전 과정에서 직접적, 간접적으로 탄소를 배출합니다. 게다가 의료기관의 규모가 클수록 의료폐기물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탄소 배출 총량도 계속해서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따라서 의료폐기물 처리 과정은 탄소 중립 전략 수립에 있어 절대 간과할 수 없는 환경 변수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탄소 배출권 거래제(ETS)란 무엇인가
탄소 배출권 거래제(Emissions Trading System, 이하 ETS)는 국가 또는 지역 단위에서 설정한 온실가스 배출 총량(cap)을 기반으로 기업이나 기관에 배출권을 할당하고, 할당된 배출량을 초과하거나 절감한 기업끼리 배출권을 사고파는 시장 시스템입니다. 이 제도의 핵심은 경제적 인센티브를 통해 온실가스 감축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ETS는 유럽연합(EU)을 시작으로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일부 주 등에서 도입되고 있으며 한국은 2015년부터 제도를 시행하여 현재 약 700여 개의 기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적용 대상은 주로 에너지,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발전소 등 탄소 다배출 업종이며 이들 기업은 할당량 이상을 초과 배출하면 시장에서 추가 배출권을 구매해야 합니다. 반대로 감축에 성공한 기업은 잉여 배출권을 판매하여 수익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행 ETS는 보건·의료 업종이나 의료폐기물 처리 업종을 직접적인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들 업종의 배출량이 상대적으로 낮고, 의료 안전과 보건 필수 서비스라는 사회적 특수성 때문에 규제 적용이 쉽지 않다는 현실적인 판단에 기인합니다. 그렇다면 의료폐기물 처리 분야는 앞으로도 탄소 시장과 무관한 영역으로 남아야 할까요?
의료폐기물 처리의 ETS 적용 가능성과 필요성
의료폐기물 처리 업종이 탄소 배출권 거래제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우선 배출량 측정 가능성과 감축 가능성이 입증되어야 하며 산업 단위의 정책적 통제가 가능해야 ETS 도입이 가능합니다. 현재 의료폐기물 소각장은 개별 업체나 지자체가 운영하고 있으며 대부분 중소규모 사업자로 구성되어 있어 단일 시설의 배출량만 놓고 보면 ETS 적용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전체 의료기관 및 폐기물 처리 시설을 통합적으로 볼 때 배출량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점입니다. 국내 의료폐기물 발생량은 연간 약 27만 톤(환경부 자료 기준) 이상이며 이 중 85% 이상이 소각 방식으로 처리되고, 소각 시 톤당 평균 CO₂ 1.2~1.5톤 이상이 배출됩니다.
따라서 의료폐기물 처리 분야가 단순히 소규모로 치부되기보다는 의료산업 전체의 체계적 관리 대상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국내 일부 대형병원은 ESG 경영의 일환으로 자체 온실가스 배출량 산정과 보고를 시작했고, 환경단체와 병원이 협업하여 의료폐기물 감축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ETS 도입을 위한 사회적 기반 형성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신호라 할 수 있습니다.
자발적 탄소시장(VCM)과 의료폐기물 감축의 기회
ETS와 달리 자발적 탄소시장(VCM)은 법적 의무가 아닌 민간 자율 기반의 탄소 크레딧 거래 시스템입니다. 기업이나 기관이 탄소 감축 프로젝트를 등록하고 제3자 인증을 받은 뒤에 그 실적을 크레딧 형태로 시장에 판매할 수 있습니다. 의료폐기물 처리 분야는 아직 법적 배출권 의무가 없기에 VCM에 참여하는 방식이 가장 현실적인 접근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탄소 감축 실적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 고온 소각 방식 대신 플라스마나 저온 열분해 기술 도입
- 의료폐기물 운송 수단의 전기차 전환
- 의료기관 내 다회용 의료용품 확대
- 생분해성 의료소재 활용
- 의료폐기물 자동 분류 시스템 도입을 통한 분리효율 향상
이러한 프로젝트는 국제 인증기관(VERRA, Gold Standard 등)의 검증을 통해 정식 탄소 크레딧으로 전환 가능하며 ESG 보고서 제출이나 지속가능성 평가에 반영될 수 있어 병원이나 폐기물 처리 기업 입장에서 유의미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해외 사례 – 의료폐기물과 탄소 전략이 결합된 병원들
의료폐기물과 탄소 전략을 결합한 해외 사례는 단순한 환경 캠페인을 넘어 의료 시스템 자체의 지속가능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병원이 의료폐기물 관리와 탄소 배출 감축을 동시에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이는 정책과 기술, 경영 전략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국 NHS의 종합 전략
영국의 NHS(National Health Service)는 2020년 전 세계 최초로 국가 보건 시스템 차원에서 '넷제로 헬스케어' 전략을 공식화했습니다. 이 계획은 단순한 선언에 그치지 않고 병원 내 폐기물 처리, 에너지 사용, 의료 기기 구매, 수송 등 의료 서비스 전체 흐름에서 탄소를 분석하고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이행 로드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의료폐기물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실행 전략을 세웠습니다.
- 소각 중심 처리 방식에서 에너지 회수형 소각으로 전환
- 플라스틱 기반 일회용품 사용을 연간 10%씩 감축
- 공급업체에 대한 탄소 배출량 사전 보고 의무화
- 감염성 폐기물 분리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디지털 분류 시스템 시범 도입
NHS는 또한 병원별로 탄소 회계 담당자(Carbon Lead)를 지정하여 의료폐기물 처리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정량화하고 매년 탄소 배출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의료 분야에서 전례 없는 시도이며 향후 다른 국가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웨덴 병원의 선진 시스템
스웨덴 스톡홀름에 위치한 카롤린스카 대학병원은 지속 가능한 의료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이 병원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의료폐기물과 탄소 전략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 생분해성 수술복 및 장갑 사용: 자체 시험을 거쳐 기존 일회용 플라스틱 수술복 대신 생분해성 원단으로 제작된 장비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연간 20톤 이상의 CO₂를 감축했습니다.
- 폐기물 에너지 회수 시설 운영: 의료폐기물을 병원 인근에서 처리하면서 열에너지를 회수해 병원 내부의 난방 및 온수에 재활용하고 있습니다.
- 진료부서 단위 의료폐기물 감축 KPI 도입: 외과, 산부인과, 응급의학과 등 각 부서에 의료폐기물 감축 목표를 부여하고 성과를 ESG 보고서에 반영합니다.
이러한 정책은 단지 환경보호 차원을 넘어서 환자 신뢰도 제고, 병원의 브랜드 이미지 향상, 경영 효율성 확보 등 병원 운영 전반에도 긍정적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캐나다와 호주의 시도
캐나다의 일부 병원에서는 의료폐기물 발생량을 줄이기 위해 재사용 가능한 외과 수술 키트 도입이 시도되고 있으며 탄소배출량과 폐기물량을 동시에 줄이는 방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호주 멜버른 왕립병원은 전기 수거차를 도입하고 의료폐기물 운송 경로를 최적화하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물류 단계에서의 탄소를 15% 감축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해외 병원들은 단순히 폐기물을 ‘버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처리 방식, 발생량, 에너지 회수, 분리 정밀도, 물류 체계까지 포괄하는 전략적 접근을 통해 의료폐기물 관리와 탄소 감축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의료폐기물 감축은 병원의 ESG 성과를 높이는 주요 지표로 작용하며 이제는 글로벌 헬스케어 산업 전반에서 경쟁력의 요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의료폐기물은 더 이상 단순한 병원의 운영 부산물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환경적 책임, 공공의 건강, 그리고 글로벌 시장의 새로운 흐름이 함께 얽혀 있습니다. 특히 탄소배출권 거래제의 본질은 “측정 가능한 감축 활동”에 대한 가치 부여이기 때문에 의료폐기물 처리의 효율성과 친환경성이 정량화될 수 있다면 병원과 보건산업 전반이 탄소배출권 시장의 주요 참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제도적·기술적 준비가 필요합니다. 현실적으로 병원 단위에서 배출되는 의료 폐기물량과 그 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량을 신뢰성 있게 측정할 수 있는 인프라가 아직 부족하며 관련 법제 역시 산업 폐기물 중심으로 구성돼 있어 의료기관의 참여가 명확하게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 회계 기준, 병원 경영 전략이 함께 움직여야 가능한 통합적 과제입니다.
그러나 ESG 경영이 병원 경영의 표준이 되어가는 지금 앞으로 의료기관들이 탄소 감축 실적을 증명할 수 있다면 이는 단순한 공공 책임을 넘어 금전적 보상과 국제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고도화된 추적 시스템, RFID 및 AI 기반 폐기물 분석, 생분해성 소재의 도입 등은 그 자체로 탄소 감축 기여도가 높은 항목으로 보고될 수 있으며 의료폐기물 관리가 온실가스 감축 활동으로 공식 인정받는 시대는 머지않아 다가올 것입니다. 이제는 탄소배출권이 제조업이나 에너지 산업에만 해당된다는 고정관념을 벗고 의료 산업도 탄소 감축의 중요한 축이자 기회의 영역으로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의료폐기물 처리의 혁신이 바로 그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의료폐기물은 비용이 아닌 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탄소 배출권이 그 가치를 증명할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