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도상국의 의료폐기물 시장, 문제일까 기회일까?
의료폐기물은 전 세계 공중보건과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개발도상국에서의 의료폐기물 관리 문제는 보다 심각하고 복합적인 양상을 띱니다. 선진국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인프라와 제도적 체계 덕분에 분류, 수거, 소각, 멸균 등의 단계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하지만 개발도상국에서는 기본적인 수거 체계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발도상국은 의료 인프라 확장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입니다. 도시화, 인구 증가, 감염병 대응 확대 등의 이유로 병원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의료폐기물 배출량 역시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증가를 따라잡을 수 있는 의료폐기물 처리 인프라나 예산, 인력, 제도적 기반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어 문제는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한편 이런 상황은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의료폐기물은 단순히 ‘쓰레기’가 아니라 환경·보건·산업이 얽힌 복합적인 문제이자 가능성 있는 신흥 시장입니다. 그렇다면 개발도상국의 의료폐기물 문제는 정말 문제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기회의 문일 수 있을까요?
개발도상국의 의료폐기물 현실
세계보건기구(WHO)는 개발도상국에서 발생하는 의료폐기물 중 약 70~80% 이상이 비위생적으로 처리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중 상당수는 일반폐기물과 섞여서 불법 소각되거나 하천·토지 등에 무단 방치되며 이로 인한 환경오염과 질병 확산의 위험이 상존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방글라데시 다카 지역에서의 의료폐기물 수거 실패 사건이 있습니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수년간 분류되지 않은 감염성 의료폐기물이 도심의 하천과 빈 공터에 방치되어 수인성 질병 감염률이 급증하고 의료기관 주변 주민들의 민원이 잇따랐습니다. 또한 소각시설이나 멸균처리 장비의 부재, 분류 시스템 부재, 현장 인력의 교육 미비는 개발도상국 의료폐기물 문제의 주요한 원인입니다. 심지어 일부 국가에서는 감염 위험이 있는 주사기나 수술용 도구가 재사용되어 시장에 유통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단지 위생과 환경의 문제를 넘어서 기초 인권과 생명권의 위협으로까지 이어집니다. WHO는 최소한의 의료폐기물 관리 기준으로 ‘4단계 분류, 전용 밀폐 수거용기 사용, 소각 혹은 고압 멸균 처리, 기록 기반의 추적 관리 시스템’을 권장하고 있지만 개발도상국 대부분은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의료폐기물 처리 시장 – 왜 개발도상국에서 ‘기회’로 주목받나
의료폐기물 문제는 개발도상국의 위기일 뿐 아니라 환경 기술과 의료 인프라 기업에게는 새로운 성장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세계은행과 OECD 자료에 따르면 2030년까지 개발도상국의 의료폐기물 시장 규모는 연평균 8~10%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성장은 단지 의료기관 수의 증가 때문만이 아닙니다. 최근 지속가능경영(ESG), 탄소중립, 국제 공중보건 기준 강화 등으로 인해 각국 정부와 글로벌 기업들이 환경·위생 분야의 민간 파트너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유럽이나 한국, 일본의 의료폐기물 처리 전문 기업들은 동남아나 아프리카 일부 국가에 진출하여 시설 구축, 운영 대행, 기술 컨설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글로벌 ESG 펀드나 개발 협력 기관들도 의료폐기물 분야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아시아개발은행(ADB)은 2022년 캄보디아 병원 의료폐기물 처리 시스템 개선 사업에 1,200만 달러를 투자했고, 미국 국제개발처(USAID)도 필리핀 병원에 소규모 고압 멸균기 공급 사업을 벌인 바 있습니다. 이처럼 개발도상국의 의료폐기물 시장은 환경과 위생이라는 공공적 성격을 가진 동시에 민간기업의 참여가 가능한 하이브리드 영역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더욱 활발한 활동이 기대되는 분야입니다.
국가별 사례 비교
국가마다 의료폐기물에 접근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릅니다. 예를 들어 인도는 2016년 개정된 의료폐기물 관리법에 따라 전국 병원에 분류 기준과 기록 관리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IT 기반의 의료폐기물 추적 스타트업들이 등장하고 있고, 일부 주정부는 민간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소각 인프라를 민간위탁 방식으로 확충하고 있습니다. 이집트는 2020년 이후 의료폐기물 관련 법제 정비에 나서면서 프랑스·중국 등의 민간 소각 기술 기업과 협력하고 있습니다. 의료폐기물 전용 소각장을 수도권 외곽에 신설하고 각 병원에는 RFID 기반 폐기물 봉투 사용을 의무화하는 등의 정책이 시행 중입니다. 페루는 원격 지역에서 발생하는 의료폐기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동식 멸균 차량(Mobile Autoclave Unit)을 도입했습니다. 해당 장비는 전기나 연료가 제한적인 환경에서도 멸균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아마존 열대 우림 지역이나 고산지대의 작은 보건소 등에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의료폐기물 문제의 해결이 국가의 재정 규모나 기술력만으로 좌우되지 않으며 전략적인 접근과 민관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의료폐기물 인프라 수출
의료폐기물 처리는 선진국의 환경 기술 수출 산업으로 확장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소각로, 멸균기, 자동 분류기, 스마트 봉투(RFID 포함), 기록 관리 소프트웨어 등은 한국이나 유럽 국가의 중소 환경기업들이 보유한 기술력으로 이미 상용화된 상태이며 이를 개발도상국에 맞춤형으로 공급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한 중소기업은 베트남 지방 병원과 계약을 맺고 저소음·저온 고압 멸균기를 수출했으며 유지 보수와 함께 운영 교육까지 맡아 서비스형 인프라 수출(SaaS+장비) 모델을 구축했습니다. 또한, 단순 장비 공급이 아닌 공공시설 설계, 환경영향평가, 예산 컨설팅까지 포함하는 종합 의료폐기물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도 늘고 있습니다. 이는 기존의 단순 수출과는 다른 지속 가능한 파트너십 구조를 의미합니다. 선진국 정부도 이런 움직임에 호응하고 있습니다. EU 집행위원회, 독일 GIZ, 일본 JICA는 각각 보건·환경 협력 사업을 통해 의료폐기물 처리 기술을 포함하는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기술 수출과 함께 글로벌 환경 기여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고 있는 것입니다.
개발도상국 의료폐기물 문제의 그늘
하지만 의료폐기물 시장의 민간화에는 분명한 그늘도 존재합니다. 우선 민간 기업 중심의 시장 독점이 문제입니다. 의료폐기물 처리를 특정 기업이 장악하게 되면 가격이 급등하거나 공공성이 훼손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몇몇 지역에서는 소각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병원들이 의료폐기물을 불법 투기하거나 불법업체에 넘기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취약 노동자들의 건강권 침해입니다. 개발도상국 일부 지역에서는 어린이들이 쓰레기장에서 의료폐기물을 줍거나 교육받지 못한 근로자가 맨손으로 의료폐기물을 분류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산업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입니다. 또한 기업이 수익성에만 집중하게 되면 저비용 고위험 방식(무허가 소각, 적정처리 미준수)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결국 해당 국가의 환경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료폐기물 분야의 시장화에는 공공성 확보와 안전 기준 준수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하며 국제적인 감시와 협력 체계가 필요합니다.
개발도상국의 의료폐기물 문제는 단순한 환경 이슈를 넘어선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과제입니다. 위생 인프라, 제도 미비, 국제협력, 기술 수출, 공공성 확보, 민간 투자 등 다양한 측면이 얽혀 있어서 단순한 문제나 기회로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의료폐기물은 사후 처리 대상이 아니라 전체 보건 시스템 속에서 계획되고 관리되어야 할 자원이라는 점입니다. 개발도상국에서 이 문제가 잘 해결된다면 그 효과는 지역사회의 건강권 보장뿐만 아니라 지구 환경과 글로벌 보건 안전망 강화에도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분야에 뛰어들 수 있는 기술과 경험을 가진 선진국과 기업들은 단순한 공급자가 아니라 협력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자처해야 할 때입니다. 문제를 기회로 바꾸는 일, 의료폐기물 문제야말로 그 대표적인 사례일 수 있습니다.